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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등공양
불교의 등 공양문화는 부처님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여러 경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전은 연등(등불)을 꽃 · 향 · 일산 · 의복 · 당기 · 영락 · 번기 · 풍악 · 보배 등과 함께 중요한 공양물로 인식했다. 이들을 공양하면 고통이 없어지고 극락왕생하게 되며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든다는 것이 공통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등 공양은 여타 공양물과 달리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현상인 안청정(眼淸淨)이라는 것이 추가 된다.
화엄경에서는 등의 종류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소(酥) 등불 · 기름 등불 · 보배 등불 · 마니(摩尼) 등불 · 칠(漆) 등불 · 불[火] 등불 · 침수향(沈水香) 등불 · 전단향 등불 · 일체 향 등불 · 한량없는 빛깔과 광명 불꽃 등불 등이 그것이다. 이들 등불은 당시 인도사회에서 통용되는 등불의 종류를 단순히 나열한 것으로 특별한 의미는 없다. 이 보다는 등 공양을 손수 하지 않고 남을 시켜 할 때도 그 공덕은 같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즉 등 공양에 있어서 그 종류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등을 공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등 공양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빈자일등’에서도 확인된다.
‘빈자일등’은 《현우경》 ‘빈녀난타품’의 내용으로 불교에서 등 공양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가장 잘 보여준다. 가난한 여인 난타가 구걸해서 마련한 아주 작은 양의 기름등불이 다른 어떤 등불보다 오래도록 타올랐고, 신통제일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도 그 등불을 끄지 못했다는 것이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 난타는 등 공양의 인과로 후생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설화를 수록한 《잡보장경》에서도 등 공양의 정신은 강조된다. 부처님께 등 공양을 올린 결과로 죽임을 당한 여인이 그 인과로 천상에 태어나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등의 종류와 수량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단지 어려움 속에서도 부처님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면 좋은 인과로 나타난다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연등공양에 대해 가장 자세히 언급한 경전은 《불설시등공덕경》이다. 불설시등공덕경은 오직 등 공양의 공덕만을 설한 경전으로 여기서도 공양자의 마음가짐은 무엇보다 강조된다. 특히 보잘 것 없는 작은 등잔으로 번개가 치는 짧은 시간 동안 계단 하나만을 비출지라도 그 공덕은 오직 부처님께서만 헤아릴 수 있다는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등공양의 공덕에 대해서는 생전에 네 가지 즐거움과 사후에 다섯 가지 청정을 얻는다고 설한다. 네 가지 즐거움은 육신 · 재물 · 선행 · 지혜이며, 다섯 가지 청정은 청정한 몸 · 수승한 위덕 · 청정한 생각과 지혜 · 항상 뜻에 맞는 소리를 듣는 것 · 얻은 권속이 항상 그 뜻에 맞아 마음이 기쁜 것이다.
경전에서 등 공양은 단순한 공양물을 넘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현재는 공양의 정신보다 구복에 치우쳐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이라도 연등공양의 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붓다의 등롱
등롱은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능을 하거나 미적 아름다움을 위해 꾸며진 등갓을 일컫는다. 전통등도 등롱의 일종이며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전등갓인 등기구도 넓은 의미에서 등롱이다. 등롱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기능적인 등롱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능적인 부분에 미의식(美意識)을 가미한 등롱으로 발전했다.
불교에서 등롱은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등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율장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는 등롱을 제작하는 방법까지 언급하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는 붓다 입멸 후 저술되었다는 견해해 지배적이라 붓다의 직접적인 말씀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여러 경전과 율장에 등 공양의 전통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건데 붓다 제세시에 등롱이 불교문화로 자리잡았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경전의 등롱제작에 관한 언급은 붓다께서 실라벌서(기원정사)에 계실 때 야간의 경전공부에서 시작한다. 야간에 경전을 공부하는 과정에 뱀이 속출해 공부가 어렵게 되자 불을 켜서 뱀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마침 여름철이라 등불에 벌레가 많이 상하니 붓다께서 “등롱(燈籠)을 만들라.” 말씀하셨다.” 비구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니,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대나무 조각으로 만들고 엷은 베로 가리어라. 이것을 만약 구하기 어렵거든 운모(雲母)조각을 사용하라. 이것도 구하기 힘들거든 마땅히 백목병(百目甁)을 만들라.” 비구가 백목병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니,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기와 만드는 사람을 시켜서 등롱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되, 옆으로 작은 구멍을 많이 뚫으면 되느니라.” 기와 만드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병 밑을 깨뜨려 버리고 옆으로 많은 구멍을 뚫어서 등잔을 덮을지니라. 만약 구멍으로 벌레가 들어가거든 마땅히 종이나 베로 가릴지니라.”
붓다께서 말씀하신 등롱의 제작방법은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종이를 붙인 후 그림을 그리는 현대의 전통등 제작 방법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등롱의 간편한 제작을 위해 운모와 백목병(百目甁)의 사용방법까지 말씀하셨다. 운모는 《동국세시기》의 등 제작 방법에도 언급되는 재료로 과거에는 유리대용으로 사용되었다. 백목병은 흙으로 만든 그릇인데 요즘의 항아리와 비슷한 형태다. 특히 병의 밑을 깨뜨리고 구멍을 뚫어 등잔을 만들어 사용하라는 말씀은 하찮은 미물의 생명도 중시여기는 불교의 자비심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등문화는 공양으로 대표되는 관념적인 문화와 불교의 정신을 반영한 실용적인 문화가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용적 관점에서 불교의 등문화는 등을 밝히는 그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밝혀서 불교의 정신을 실현하는 실천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등공양에도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과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 지금부터라도 등을 공양하며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새기는 개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등행렬의 왜색논란
부처님오신날은 불자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전통적으로 바쁜 농번기를 잠시 쉬며 함께 즐기는 세시풍습이었다. 현대에는 전통적 의미의 부처님오신날은 쇠퇴하고 불교계 중심의 법요식과 연등축제가 주를 이룬다. 이런 변화에 대해 전통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일부는 행렬중심의 연등축제를 왜색(倭色, 일제의 잔재)이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연등축제의 왜색 논란은 일제강점기 관주도 행사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한국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이런 움직임은 불교계까지 미쳐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편입하기 위한 시도로 나타났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는 일본식으로 바꾼 봉축행사를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여기에 고위관료를 참석시켰다. 이를 개기로 사찰중심의 초파일 의식이 대중행사로 바뀌게 된다. 이때 현재 왜색 논란의 중심이 되는 제등행렬도 시작됐다.
제등행렬은 자타공인 연등축제의 대표콘텐츠다. 심지어 불자가 아닌 일반대중은 연등축제와 제등행렬을 같은 행사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만큼 제등행렬은 대중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문화콘텐츠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등축제의 제등행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있을 정도다. 이런 한국불교의 대표 문화콘텐츠가 아직도 왜색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은 심히 아쉽다.
연등축제가 왜색이라는 주요논리는 제등행렬이 일본에서 주로 행해지는 퍼레이드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지극히 지엽적인 관점에서 연등축제를 바로 보는 것이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불교는 2천년에도 퍼레이드 형식의 의식인 ‘행상’이 존재했다. 이런 의식은 한국에도 전해졌을 것이며, 그 흔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가장 쉽게 혼례와 신행에 사용되는 청사초롱이 있고 왕의 어가행렬에 사용되는 등촉도 퍼레이드 형태다. 여기서 사용되는 등은 단순히 앞길을 밝히는 조명보다는 의식도구에 가깝다. 이는 대낮에도 등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된다. 무속의 등행렬도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불교의 제등행렬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불교에서 등이 소망을 담는 그릇이라면, 무속은 주로 망자를 위한 길잡이나 혼이 깃든 안식처로 인식되는 점이다. 이 밖에도 관리가 행차할 때 등급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등인 품등, 상례에서 상여를 장식하는 등도 퍼레이드 형태의 등이다.
문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문화를 원형만을 고집한다면 현재 우리가 한국의 전통문화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설사 제등행렬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이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연등축제도 원형만을 따진다면 고려시대 연등회나 조선시대 관등놀이를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연등축제에 대한 소모적인 논란을 종식할 때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연등축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포교하기 위한 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 할 때다.


연등회의 시기변화
전국을 강타한 코로나 19로 초파일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혹자는 이를 비판하고, 혹자는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불교계의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연등회만 놓고 보면 많은 시기의 변화를 겪으며 현재와 같은 음력 4월 8일로 정례화 됐다.
한국적 개념의 연등회, 정확히는 연등공양 문화는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의 일환이다. 이런 전통이 언제 시작됐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부처님 재세시의 등공양문화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인도에서 불교의 연등문화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인도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혼합된 것에 기인하며, 결과적으로 인도의 연등문화를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법현스님의 《불국기》에 ‘4월 부처님의 탄생일을 맞아 연등을 공양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의 연등공양도 4월에 진행됐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연등공양문화는 중국에 유입되어 시기가 변화한다. 중국은 한나라 때인 서력기원 전후로 불교를 받아들인다. 이때 불교의 연등문화도 함께 유입됐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연등문화는 기존 습속과 결합해 정월과 2월의 등회(燈會로) 나타난다. 특히 정월 보름은 대표적인 연등(燃燈)일로 현재도 등축제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2월 등회의 풍속은 6세기 중국 남부의 풍속을 소개한 《형초세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2월 8일을 붓다의 탄신일로 보고 등을 공양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4월에는 관욕을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성탄절과 열반절을 특정하지 못한 탓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연등문화도 초기에는 중국과 같이 정월보름에 진행되었다. 《삼국사기》의 “경문왕이 황룡사에서 등을 구경했다”는 866년 정월 보름의 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같은 문헌에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연등문화는 정월보름이 확실해 보인다.
고려시대 연등회는 시기에 많은 변화를 겪는다. 《고려사》의 기록만 봤을 때 정월 연등회가 40여회, 2월 연등회가 120여회, 4월 연등회가 10여회 확인된다. 여기에 3월, 5월, 9월, 10월에도 연등회를 개최한 기록이 있다. 또한 한해에 2월 연등회를 개최하고 다른 달의 연등회를 개최하는 기록도 있다.
고려의 연등회가 왜 2월이 주류가 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2월은 출가절과 열반절이 있는 달이라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 할 뿐이다.
현재와 같은 초파일 연등회는 1166년 기사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연등회의 중심은 2월이었으며 4월 연등회는 고려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기 연등놀이는 정월과 4월이 혼합되어 개최된다. 그러다 세종 이후 4월 연등으로 정례화 된다. 이런 변화는 국가중심의 행사였던 연등회가 민간중심의 관등놀이로 변화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국가주도의 연등회가 민간중심의 관등놀이로 변화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등회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맞아
한국불교는 12월 16일 연등회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라는 경사를 맞았다. 이는 불교의 문화유산을 세계가 인정한 뜻 깊은 일이며, 연등회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불자들의 노력이 이룬 성과다.
연등회는 신라시대 시작되어 1천2백여 년의 시간 동안 시대상을 반영하며 발전했다. 고려시대까지 왕실이 주도하는 국가행사로 진행되다가 조선시대부터 민간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으로 잠시 관주도 행사가 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 불교계가 주도하는 불교행사로 정립되었다. 하지만 연등회의 해방 이후 위상은 국가행사에 버금갔다. 이는 이전의 민간 세시풍속인 관등놀이의 전통이 남아있었으며, 국민 대다수가 불자였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와 같은 축제형식의 연등회는 1990년대 연등축제와 함께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불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연등회는 국민축제로 거듭난다. 그러나 연등회의 축제화는 국민이 함께 즐기는 불교문화라는 것에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근본정신을 사회에 알리고 환원하는 통로라는 점이다.
연등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연등(燃燈)이 중심이 되는 행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연등이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등을 보며 즐기던 관등놀이에 치우친 민속적인 의미의 용어이다. 불교적으로는 연등회보다 성탄법요식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붓다의 정신과 의식을 강조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현재 성탄절이라고 하면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는 용어의 독점이다. 성탄은 성인의 탄생일이라는 의미를 갖고 단어로 붓다의 탄생일도 당연히 성탄절로 칭하는 것이 맞다.
연등회의 중심도 연등이 아니라 법요식이 중심이어야 한다. 물론 연등회에서 연등의 제작에 시간과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며 연등행렬 만큼 볼거리가 풍성한 콘텐츠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불자들마저 연등회의 본래 의미는 잊은 채 연등의 화려함에만 취해 연등회의 본래 의미를 망각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행위다. 연등은 붓다의 탄생을 기리며 경탄하기 위한 요소일 뿐이고, 핵심은 붓다의 정신을 기리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등은 연등회의 주연일 수 없으며,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 연등회는 국민 모두가 즐기는 축제. 나아가서 세계인이 함께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목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조금씩 구체화 되고 있다. 이런 최근의 상황들은 대단히 고무적이며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게 한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연등회가 불교의 근본정신보다 축제화와 집중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불교에서 시작된 문화는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중생 모두가 생사윤회의 사슬을 끊고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위해 연등회도 기획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연등회는 축제를 넘어 세계인에게 불교의 정신문화를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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