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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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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등
한국의 등문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 고분에서 등의 원형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삼국시대 등은 단순한 조명자치는 아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불교의 전래는 한국 등문화에 변화를 가져온다.
한국등의 원시적인 형태는 357년 축조된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을 통해 확인 된다. 안악3호분 주실의 대행렬도에는 등롱을 들고 가는 인물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 인물은 무덤주인의 수례 앞에서 불을 밝히는 듯한 모습으로 좌우에 3명씩 모두 6명이 배치돼 있다. 이들이 들고 있는 등은 청사초롱과 유사한 형태이며, 손잡이를 이용해 어깨에 걸친 모습이다. 이는 조선시대 어가행렬에서 나타나는 등촉수를 연상케 한다. 등촉수는 등롱이나 초롱을 든 인물을 의미하는데, 불 밝히는 역할을 넘어 왕의 행렬을 알리는 의례적인 목적의 수행원이다. 안악3호분의 행렬에서 보이는 등을 든 인물 역시 조명을 밝히는 역할보다 의례적인 역할이 커 보인다.
이외에도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고분과 5세기에 축조된 수산리 고분에서도 등으로 추측되는 형태가 확인된다. 이들 고분에서 보이는 등은 세월에 퇴색되어 명확한 형태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벽화의 그림형태를 ‘깃발로 보느냐, 등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현장에서 벽화를 직접 확인한 북한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등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보아 등에 무게가 실린다.
이중 북한학자 김호섭의 의견은 논란을 잠재우기 충분하다. 그는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춘 춤 가운데는 등롱을 손에 쥐고 추는 춤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덕흥리 고구려 벽화무덤 서벽과 천장의 벽화에 등롱 같은 것을 손에 쥐고 날아가는 선인과 옥녀를 그린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이 벽화의 선인과 옥녀가 쥐고 있는 것을 깃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 형태상으로나 풍속상으로 보아 등롱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등롱을 쥐고 춤추는 ‘등불놀이’를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준다.”고 밝히고 있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인 무령왕릉에도 등잔이 5개나 발견된다. 이들 등잔에는 그을린 자국과 함께 타다 남은 심지가 발굴되어 이들 등이 실제 의식용으로 사용됐음을 확인시켜준다.
문헌에서는 ≪삼국사기≫를 통해 등의 사용을 최초로 확인 할 수 있다. 886년의 기록으로 “경문왕이 정월 15일 황룡사에서 등을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잔치를 배풀었다”는 기록과 진성왕 4년(890년)에 같은 내용이 다시 간략히 기술된 대목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등공양의 공덕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등문화가 불교와 함께 유입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불교의 등문화는 공양으로 대표되는 기원의 문화다. 이런 전통은 1천5백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 할 수 있다. ‘빈자일등’의 일화는 어쩌면 과거보다 현대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고사라 하겠다.


고려전기의 등
현재 부처님오신날 관등놀이를 ‘연등회’라 한다. 이는 현재의 연등회가 고려시대 연등회를 잇는 전통행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상징한다. 연등회의 시작은 고려의 건국과 함께 했다. 이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연등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연등회와 함께 훈요십조에 언급된 팔관회가 태조 원년(918)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연등회도 비슷한 시기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 할 뿐이다.
고려사에 팔관회에 대한 기록만 보이고, 연등회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명확히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팔관회는 고려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국가의례이며 연등회는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던 행사라는 차이는 분명하다. 즉 새로운 국가행사인 팔관회는 처음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꼭 언급할 필요가 있었지만, 연등회는 이전부터 행해지던 연례행사였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아니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불교행사인 연등회를 누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시대 연등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성종 원년(982) 최승로가 왕에게 올린 <시무 28조>를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최승로는 ‘팔관회와 연등회의 준비에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노역이 심히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려사》에 연등회의 개최 보다 연등회의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이 먼저 언급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성종 이전부터 연등회가 국가행사로 성대하게 열렸다는 것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성종 시기는 연등회의 수난기였다. 성종은 고려의 정치체계를 확립한 왕으로 건국 초기 통치이념을 중국식의 유교적 통치이념으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에 따라 성종 6년(987)에는 국가의 중요행사였던 팔관회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이때도 연등회 폐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연등회도 함께 폐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종 원년(1010) 연등회를 복구 시켰다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연등회의 폐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발을 불러온다. 특히 성종 12년(993)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에 ‘연등회와 팔관회를 회복해야 한다.’는 이지백의 상소는 연등회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도 연등회를 금하기는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관등행사까지 막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연등회가 공식적으로 복구되기 전인 목종 12년(1009) ‘왕이 궁궐에서 관등을 했다’는 기록으로 추측 할 수 있다. 비록 이 시기가 성종 사후지만 공식적으로 연등회가 개최되지 않은 시기에도 궁궐에서 관등이 이뤄졌음은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연등회는 현종 원년(1010) 복구를 통해 다시 연례행사로 진행된다. 심지어는 현종 2년(1011)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피난을 떠난 청주의 행궁에서도 연등회는 개최된다. 이렇듯 연등회는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해 행해지는 국가의례였다. 코로나19로 전국이 떠들썩한 요즘 같은 시절에는 선조들의 간절했던 연등회가 새삼 생각난다.


고려후기의 등
고려 후기 연등회의 가장 큰 변화는 이전까지 국가의 고유한 권리였던 연등행사를 민간에서도 개최한 것이다. 정확히는 왕실이 독점했던 연등회의 상징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무신정권기 왕권의 쇠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시대 연등회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국왕의 권위이자 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연등회를 개최할 것을 당부하고 이를 대대손손 행할 것을 당부한 부분에 잘 나타난다. 실제 고려왕조는 전 기간에 걸쳐 태조의 유훈을 잘 지켰으며 당연히 연등회는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연례행사로 진행되었다. 또한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연등도감’ 임시기구를 개설했다. 물론 연등회가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연등회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최되는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는 외적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도 현지에서 연등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수도의 발달 된 문화가 지방으로 이전되는 효과로 나타났으며 연등회의 지방 전파로 이어졌다.
연등회는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행사였다. ≪고려사≫에는 연등회는 비용 낭비가 심하니 폐지해야 한다는 상소가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런 논리는 연등회 폐지를 주장하는 측의 주된 논거였으며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계속된다. 하지만 연등회는 당시에는 적수를 찾을 수 없는 화려한 볼거리인 등이라는 콘텐츠와 소원성취라는 기원이 결합해 이어진다.
연등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재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가행사를 개인적으로 개최한다는 점에서 왕과 버금가는 권력자임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연등회는 국가와 왕의 전유물이었으며 개인이 감히 개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왕권이 약화된 무신정권기 최이(최우)가 연등회를 개최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최이는 고려 무신정권기 최고의 권력가로 30여 년을 권력의 최상부에 군림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왕을 능가했다. 이런 최이였기에 왕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연등회를 감히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재원 마련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최이가 연등회를 개최한 때는 1245년(고종 32년) 4월 초파일로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에 천도한 시기였다. 이때 최이는 연등회에 채붕(彩棚)을 설치하고 기악과 각종 놀이를 밤새도록 즐겼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로 담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기서 채붕은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한 가설무대를 말하며 각종 공연은 여기에서 올라가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최이의 연등회 개최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고려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임을 표방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연등회 = 국왕”이라는 공식이 깨졌고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개최할 수 있는 당위성이 부여되었다. 이는 이후 연등회의 민간 개최로 이어지고 조선시대 세시풍속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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